모든 그리스도인은 3중 경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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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3중 경청자! *
침신대 상담심리학과 유재성 교수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요즘은 조금 줄었지만 국민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극동방송에서 상담을 할 때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사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존재’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교회에서 늘 미소 지으며 얼굴을 마주 대하는 사람들도 조금만 대화를 하면 금방 눈물지으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무출구’와도 같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많은 경우, 어떤 신학적 정답이나 철학적 논리가 아니다. 인생의 밤에 가슴앓이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들의 아픔을 싸안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것일 수 있다. 경제 빙하기를 맞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이야기나 심정을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영국의 목회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중 경청자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 귀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다른 귀로는 주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 경청(double listening)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가 더 필요하다. 가슴이라는 제 3의 귀를 통해 먼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삼중 경청자’가 되어야 한다.
‘경청’은 기본적으로 잘 듣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주의하여 듣는다’(傾聽)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다’(敬聽)는 뜻도 있다. 여기에서 ‘청’(聽)이란 한자를 풀어보면 ‘듣는 일에는 임금이 되고, 열 번을 헤아려 살펴보고 마음을 하나로 꿰뚫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경청’이란 ‘귀를 기울여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헤아리며 존중하는 태도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눈과 달리 귀에는 눈꺼풀처럼 닫는 문이 없다. 늘 열려 있다. 누구나 듣기 쉽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사람의 말을 공평하고 균형있게 들으라고 열려진 두 귀를 주셨다. 그러므로 듣는 것 자체는 본래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상대방의 마음을 하나로 꿰뚫으며 잘 듣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의 내면세계가 불안전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은 물론 하나님의 소리도 제대로 듣기 어렵다.
잘 경청하는 것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수용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다.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까지 말을 끊거나 대응할 말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며 들음으로써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 존중과 사랑을 표현한다. 이러한 반응은 상대방의 뇌에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주어 부정적인 감정의 개입이나 방어적 태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MBC의 김성주 아나운서는 자신이 경험한 독일을 ‘축구를 잘하는 나라, 칭찬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나라’로 묘사한 바 있다. 월드컵 후 박주영 선수에 대해 “골만 잘 넣지 패스나 수비는 못하는 것 같아. 반쪽짜리 선수아냐?”라고 수근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는 독일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골 하나는 잘 넣잖아? 좀 지켜보자구”라고 말할 것 같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것을 충청도 버전으로 하면 “냅둬유!” 혹은 한때 유행한 말로 “너나 잘 하세요”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는 제대로 된 칭찬과 이야기들이 월드컵 강국 독일 축구를 만들어냈고, 건실한 독일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세상을 만들어간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말을 하느냐에 따라 상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상대의 말을 늘 부정적으로 듣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의 영혼을 허물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자존감이나 자기이미지가 낮은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이러한 현상의 희생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도적인 관심’을 갖고 ‘적극적 경청’과 ‘살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남을 깎아내리고 비방하며 탓하는 이야기가 난무하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서로를 존귀히 여기며 귀 기울여 듣고 살리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며 일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 흔적을 남기신다. 따라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잘 듣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삼중 경청자가 되면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인정하고 칭찬할 요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찾아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럴 때 개인이 살고 가정이 회복되며, 교회와 나라가 건강하게 구축될 수 있다. 기독교는 남을 죽이기보다 살리는 이야기로 만들어져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침례신문>에 실은 글을 소개합니다. 라이프웨이 편지를 다시 시작하며 저부터 먼저 '3중경청자'가 되어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주 안에서 3중 경청을 실천하며 조금 더 행복한 일상, 가정,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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